월요일이 사라졌다
월요일이 사라졌다

《월요일이 사라졌다》와 차우셰스쿠 정권을 겹쳐 보며

이 글에는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핵심 반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곱 쌍둥이가 요일을 이름으로 갖고, 자기 이름에 해당하는 날에만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 일곱 명이 한 사람의 신분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월요일, 먼데이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영화가 《월요일이 사라졌다》였다.

제목을 떠올리고 나니 다른 이름 하나가 따라 나왔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확히는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이자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엘레나 차우셰스쿠였다.

두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게 된 것은 출산 정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떠올려 보니, 나를 붙잡은 것은 다른 장면이었다.

국가가 아이들을 데려가는 장면이었다.

낳으라는 국가와 낳지 말라는 국가

차우셰스쿠 정권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낙태와 피임을 강하게 제한했다. 1966년의 낙태 제한 조치가 대표적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국가의 인구 목표에 종속되었다.[1]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국가는 반대로 움직인다. 인구 과잉과 자원 부족을 이유로 한 가정에 한 아이만 허용한다. 그 기준을 넘어서 태어난 아이들은 국가가 데려간다.

한쪽은 더 낳으라고 하고, 다른 쪽은 더 낳지 말라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반대다.

그런데 출산을 결정하는 주체를 보면 닮아 있다. 얼마나 낳을지, 누구와 가족으로 살아갈지를 국가가 정한다. 부모의 사정과 아이의 삶은 그 결정 뒤로 밀린다.

나는 이 지점에서 두 이야기가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국가가 사람을 인구라는 숫자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생기는 문제 말이다.

동면이라는 약속

영화에서 국가는 데려간 아이들을 당장 죽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동면 상태로 보존하고,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미래에 깨우겠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는다. 지금의 이별은 잠시 미뤄 둔 삶이며, 아이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동면 시설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그 설명은 무너진다. 아이는 보존되는 대신 소각된다.[2]

이 장면이 끔찍한 것은 살해 자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부모가 붙잡고 있었을 마지막 희망까지 거짓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지금은 만나지 못해도 더 나은 세상에서는 다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아이가 사라진 자리를 덮는다.

영화 속 국가는 아이의 생명과 함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권리까지 빼앗는다.

루마니아의 시설에 있던 아이들

이 장면을 보며 차우셰스쿠 정권의 아동 시설을 떠올렸다.

휴먼라이츠워치의 1990년 보고서는 강제적인 출산 장려 정책과 열악한 아동 수용 시설의 관계를 지적한다. 정권 붕괴 후 외부에 드러난 시설에서는 심각한 방임과 돌봄 부족이 확인되었다.[3]

여기서는 역사와 영화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영화처럼 동면을 약속하며 아이들을 데려가 조직적으로 소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시설의 방임과 영화 속 계획적인 살해를 같은 사건으로 취급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를 겹쳐 보게 되는 이유가 있다.

출산을 요구한 국가가,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의 삶을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시설 안으로 들어간 뒤 어떤 생활을 하는지, 제대로 먹고 치료받으며 자라는지 사회가 살펴야 했지만, 보호받아야 할 공간에서조차 아이들은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

영화와 역사의 연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는 사실이 아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

내가 닮았다고 느낀 것은 그다음이었다

처음에는 출산을 강요하는 정책과 출산을 금지하는 정책을 비교했다. 하지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이를 데려간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부모와 떨어진 아이가 사회의 눈에서도 멀어질 때, 누가 그 아이의 안부를 확인하는가. 국가가 보호하고 있다는 설명만으로 우리는 안심해도 되는가.

영화 속 아이들은 동면이라는 말 뒤로 사라진다. 루마니아의 시설 아동들은 돌봄을 받아야 할 곳에서 방임을 겪었다.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보호를 맡은 권력을 계속 들여다봐야 한다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설에 들어갔다는 것은 돌봄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의 관심이 끝나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한 명의 악녀라는 설명을 넘어서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떠올릴 때 ‘악녀’라는 표현이 먼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의 폭력과 아동 시설의 비극을 한 여성의 잔혹성만으로 설명하면,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제도와 책임의 구조를 놓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확인되지 않은 ‘수만 명 학살’이라는 숫자를 개인에게 곧바로 붙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독재 정권의 탄압, 출산 통제, 시설에서 발생한 피해는 각각 근거와 책임을 따져야 한다.

내가 두 이야기를 연결한 이유는 악한 인물 둘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출산과 양육을 통제하는 권력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묻고 싶어서다.

이 영화가 실제로 차우셰스쿠 정권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글은 제작 의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영화를 보며 떠올린 나의 해석이다.

아이가 살아갈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는 아이가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들 뒤에는 이미 태어나서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가 있다.

먹어야 하고, 아프면 치료받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안겨야 하는 아이. 인구 목표가 달성되거나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성장을 멈추고 기다릴 수 없는 아이.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소각 장면과 루마니아의 아동 시설이 내 안에서 겹쳐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국가가 말하는 미래가 커질수록,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의 현재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말 다음에는 반드시 확인이 따라야 한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누구와 지내고 있는가. 오늘도 무사히 살아 있는가.

### 참고 자료

1. Cristian Pop-Eleches, 루마니아의 낙태 제한과 출산 정책을 분석한 연구: The Impact of an Abortion Ban on Socioeconomic Outcomes of Children

https://www.columbia.edu/~cp2124/papers/fertility_latest.pdf 2. [IMDb, What Happened to Monday — Plot](https://www.imdb.com/title/tt1536537/plotsummary/) 3. Human Rights Watch, 1990, [Romania’s Orphans: A Legacy of Repression](https://www.hrw.org/report/1990/12/01/romanias-orphans-legacy-repression)

이 글은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역사적 비교를 담았다. 영화 속 동면·소각 설정과 루마니아의 실제 아동 시설 피해는 서로 구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