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고려 초였습니다.

왕실과 호족이 나란히 있던 때였습니다.

이 나라에는 마음씨 착한 임금과 예쁜 왕비가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성품이 착한 왕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왕자에게 다가왔습니다.

며칠째 밥을 굶은 것 같았습니다.

왕자가 궁녀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세요.

내일도요."

궁녀는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았습니다.

고양이는 먹이를 다 비우고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왕자는 글을 읽을 때면 고양이를 무릎에 올렸습니다.

고양이는 그 무릎에서만 눈을 감았습니다.

남색 포를 입은 소년이 글을 읽고 무릎 위 검은 고양이가 눈을 감고 있는 장면
남색 포를 입은 소년이 글을 읽고 무릎 위 검은 고양이가 눈을 감고 있는 장면

그런데 이 평화로운 나라에 전란이 일어났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많았습니다.

더 강한 나라에 왕위를 넘기고, 그 자리에서 큰 자리를 받으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악한 자를 사람들은 절대악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왕의 곁에서 웃고, 돌아서면 왕의 자리를 재었습니다.

절대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딸을 불러 앉혔습니다.

"왕비가 먹는 그릇에 이것을 넣으라."

딸이 물었습니다.

"죽습니까?"

"당장은 아니다.

많이 먹으면 환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린다.

그다음에 몸이 쇠한다."

그 독은 사람을 당장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이 먹으면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게 했고, 나중에는 몸이 점점 쇠해 죽게 했습니다.

왕비의 손은 어느 날부터 숟가락을 잘 쥐지 못했습니다.

왕자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누가 보입니까?"

왕비는 빈 자리를 보고 웃었습니다.

"네 아버지가 저기 서 계시잖니."

임금은 그 시각,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왕비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세자와 임금뿐이었습니다.

전쟁은 임금의 실력으로 간단히 이겼습니다.

이긴 뒤에 왕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절대악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임금은 왕비의 죽음을 절대악의 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절대악의 곁에 첩자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절대악의 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나라의 신하들이 그 결혼을 밀었습니다.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절대악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 사이에서도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임금은 착한 첫째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절대악은 분노했습니다.

"형에게 자리를 주면, 내 핏줄은 영원히 신하다."

그는 그때부터 임금에게도 그 독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임금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밤마다 빈 왕비의 얼굴을 보았고, 낮에는 칼이 무겁다 했습니다.

그때 전쟁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절대악이 임금 앞에 엎드렸습니다.

"옥체는 전장에 나가실 몸이 아닙니다.

세자가 나가야 합니다."

임금은 오래 말이 없다가, 이제 열여섯인 왕자를 불렀습니다.

"네가 나가야겠다."

왕자의 손이 떨렸습니다.

"저는 칼을 들면 손이 먼저 엎드립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나라에서 제일 힘이 센 호위대장 다섯을 붙이마.

그들은 너만 지킨다."

절대악은 같은 날 밤, 군대에 밀정을 넣었습니다.

"때가 오면 왕자를 죽여라.

칼은 적군의 것으로 보이게 하라."

다음 날은 왕자의 출정 선언일이었습니다.

사실 왕자는 무술을 잘하는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머리를 잘 쓰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의 왕이라면 어울렸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환란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출정 전날 밤이었습니다.

왕자는 갑옷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무릎으로 올라왔습니다.

"왕자님.

저는 사실 삼신 할머니로부터 왕자님을 지키라고 보낸 미물입니다."

왕자는 눈을 닦았습니다.

"고양이가 말을 하면, 나도 이미 죽은 건가."

"아직입니다.

제가 왕자님과 몸을 바꾸겠습니다.

전쟁터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왕자님은 죽지 않습니다."

"그럼 나는."

"고양이가 되어, 궁궐 어딘가에 숨어 계시면 됩니다.

고양이 한 마리 없어진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왕자는 고양이의 등을 더듬었습니다.

"너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마를 왕자의 이마에 댔습니다.

촛불이 켜진 방에서 소년이 무릎을 꿇고 검은 고양이가 이마를 대며 뒤에 갑옷이 놓인 장면
촛불이 켜진 방에서 소년이 무릎을 꿇고 검은 고양이가 이마를 대며 뒤에 갑옷이 놓인 장면

눈을 떠 보니 왕자의 손이 작았습니다.

아니, 손이 아니었습니다.

발바닥이었습니다.

왕자의 몸에 들어간 고양이가 갑옷을 집어 들었습니다.

"숨어 계십시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전쟁은 그 몸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겁 많던 세자가 갑자기 용맹해지자 장군들은 말을 잃었습니다.

호위대장 하나가 중얼거렸습니다.

"어제까지 칼집에서 손을 떼지 못하시던 분이."

이제 막강해진 이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나라는 없어졌습니다.

매일 조공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너그러운 임금은 그들을 호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평화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절대악에게는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왕자를 죽이려던 복병은 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장군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누가 시켰느냐."

포로는 입술을 떨었습니다.

"...."

만약에 절대악 그 이름이 나온다면, 절대악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대악이 먼저 밀정을 보냈습니다.

"탈옥시켜라.

그리고 다른 병사의 칼로 죽여라.

이름은 무덤까지 가져가게 만들어라."

겨우 입을 막은 절대악은 아직 이 나라와 화친하지 않은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 나라의 왕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가 길을 열겠습니다.

이기시면 왕권은 당신 것입니다."

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고양이의 영혼이 들어간 왕자의 몸이 출전한 사이, 절대악은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화가 난 절대악은 왕자의 영혼이 들어간 고양이를 들어 올렸습니다.

고양이 눈 속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른쪽 눈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 칼로 죽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삼신 할머니가 나타났습니다.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부하를 죽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절대악은 칼을 쥔 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아이 안의 영혼은 왕자다.

죽을 때마다 오른쪽 눈이 없는 새끼로 돌아온다."

할머니는 고양이의 영혼이 들어간 왕자의 몸을 보았습니다.

그 몸은 전쟁터에서 뒤늦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저 몸 안의 영혼은 고양이다.

어른이 된 뒤로는 죽지 못한다.

다시 고양이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할머니가 절대악을 보았습니다.

"네가 끊은 것은 이 둘이 제 몸으로 돌아갈 길이다.

끊어진 길은 너희 셋이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이어질 것이다."

절대악은 시간이 없는 우주에 몸이 갇혔습니다.

죽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삼신 할머니도 고양이 몸으로 죽은 왕자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은 다른 곳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영혼은 왕자의 영혼이었습니다.

오른쪽 눈을 잃은 채였습니다.

임금은 독이 끊기자 다시 건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임금이 죽자, 고양이의 영혼이 들어간 왕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고양이로 돌아가야 할 영혼은, 왕자의 영혼이 들어간 고양이가 죽는 바람에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 그 몸은 영생의 시간을 살아야 했습니다.

절대 늙지 않았습니다.

그 삶을 계속했습니다.

왕이 된 고양이의 영혼은 이름을 여러 번 바꿨습니다.

세대를 지나, 지금 이 시대까지 왔습니다.

자신이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고양이로 변한 왕자도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른쪽 눈이 없는 새끼는, 죽을 때마다 다른 골목에서 눈을 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