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 · 성문과 판

곡창 요새의 틈으로 인질이 걸어 나온다.

코끼리 부대의 새벽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코끼리 부대의 새벽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현재의 포위전에서 물러난 바흐람의 군대는 다샤푸라를 빠져나와 북쪽 곡창 요새로 들어갔다.

후퇴는 패주처럼 보였지만 기병은 질서 있게 빠졌다. 바흐람은 빼앗은 곡식과 인질을 요새에 넣어 두고, 말라바 군대가 굶주린 성을 버리고 추격하기를 기다렸다.

아린드라는 추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샤푸라에 닷새 분의 곡식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연합군과 합류했다. 여왕은 성에 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갈 도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곡식은 자루 수만 세지 않았다. 창고지기 둘과 타라가 무게를 달고, 젖은 자루를 따로 갈랐다. 군용 표식을 찍은 뒤 배급소 세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그 절차가 끝나자 아린드라는 성의 수비대와 추격군 명단을 여왕 앞에 놓았다.

“다라세나를 데려가거라.”

“성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는다.”

여왕은 부러진 빗장을 새로 맞추는 목수들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적을 따라가고, 나는 사람들이 돌아와 잠글 문을 만들겠다.”

아린드라는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봉화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낮의 검은 연기 둘은 적이 되돌아온다는 뜻, 밤의 불 셋은 곡식을 더 보내 달라는 뜻이었다.

구원군에는 코끼리 여덟 마리가 있었다. 부대장 난다는 코끼리보다 작은 몸으로 여덟 마리의 기수를 지휘했다. 아린드라는 가장 큰 수컷을 보고 이름을 물었다.

“마탕가입니다.”

“저 성문을 부술 수 있습니까?”

난다는 요새 벽의 높이와 해자 너비를 가늠한 뒤, 코끼리의 발을 살폈다.

“문까지 살아서 갈 수 있다면요.”

왕자는 그 대답을 회의 때 그대로 옮겼다. 장군들은 성문이 아니라 길을 먼저 보았다.

회의 바닥에는 정찰병이 재어 온 해자의 폭을 밧줄 매듭으로 표시했다. 가장 좁은 곳도 코끼리 한 마리가 발을 디디기에는 모자랐다. 공병장은 흙자루를 세 겹으로 놓고 그 위에 통나무를 깔자고 했다. 난다는 통나무가 굴러가지 않도록 양옆을 돌로 물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코끼리는 다리를 한 번 삐면 전투가 끝난 뒤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공격에 쓸 짐승이 아니라, 돌아오는 길까지 계산해야 할 군사로 코끼리를 보았다.

사흘 동안 활쏘는 병사들이 성벽 위의 움직임을 막았다. 방패를 든 공병들은 해자의 좁은 구간을 메웠다. 밤마다 적이 나와 흙자루를 걷어 갔고, 새벽마다 다시 채웠다. 타라는 후방의 치료소에서 공병의 손을 씻기다 손톱 밑에서 흙과 피가 함께 나오는 것을 보았다.

공병들은 손가락에 천을 감고 다시 해자로 갔다. 성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면 앞사람은 큰 방패를 세우고, 뒤의 둘은 자루를 밀었다. 한 줄을 채우는 데 반나절이 걸렸고, 밤의 기습은 그것을 한 식경 만에 허물었다.

넷째 밤에는 옛 물길을 아는 농부가 왔다. 바흐람의 군대에 곡식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요새 서쪽의 낮은 벽이었다. 오래전 증축한 부분이라 돌 사이의 결속이 약했다. 공병들은 방패와 어둠을 빌려 그 아래를 파냈다.

“벽 안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곡식 말리는 뜰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사람이 사는 집은?”

“벽에서 멀리 있습니다.”

농부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린드라는 그 점을 믿었다. 그는 농부에게 길을 직접 안내하라고 하지 않고 진흙판에 물길을 그리게 했다. 길을 익힌 공병 둘이 앞장섰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복수할 기회를 준다는 말로 목숨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공병들은 벽 아래 흙을 한꺼번에 빼지 않았다. 사람이 기어들 틈을 판 뒤 나무 받침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다. 돌가루가 목 안에 붙어 물을 마셔도 씻기지 않았다. 마지막 받침에는 긴 밧줄을 묶어 먼 곳에서 당길 수 있게 했다.

공격 당일 새벽, 바흐람은 성문 앞에 코끼리가 선 것을 보았다. 그는 궁수들을 북문으로 모았다. 아린드라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작은 깃발을 내렸다.

북문 앞의 횃불은 일부러 많게 피웠다. 코끼리 여덟 마리의 그림자가 성벽에 겹쳐 실제보다 큰 부대처럼 보였다. 난다는 짐승들이 불빛에 놀라지 않도록 전날부터 같은 냄새의 기름을 가까이에서 태웠다.

서쪽에서 나팔이 울렸다.

공병들이 물러난 뒤 낮은 벽이 먼지를 뿜었다. 나무 받침이 꺾이고 아래쪽 돌이 흘러내렸다. 성 위 병사들이 한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북문 앞으로 마탕가가 걸어왔다.

난다는 짐승을 뛰게 하지 않았다. 해자를 메운 길이 무너지지 않는지 한 걸음씩 확인했다. 등 위의 궁수가 활을 당겼고, 양옆의 보병들이 성 위를 향해 방패를 들었다.

첫발을 올린 마탕가가 코를 말아 올렸다. 흙자루 아래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난다는 발뒤꿈치로 재촉하지 않고 짧은 음성을 반복했다. 사육병 하나가 앞에서 걸으며 대나무 막대로 디딜 곳을 두드렸다. 길이 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음 걸음을 불렀다.

마탕가의 이마가 문에 닿았다. 둔한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첫 충격에 문틀의 먼지가 떨어졌다. 두 번째에는 나무를 묶은 쇠가 비틀렸다. 적이 위에서 돌을 밀자 오른쪽 코끼리의 기수가 팔을 맞았다. 짐승이 뒤로 흔들렸고, 난다는 즉시 그 짐승을 빼냈다.

다친 기수는 안장에서 내려오면서도 고삐를 놓지 않았다. 사육병 둘이 코끼리의 눈을 천으로 가리고 뒤로 이끌었다. 치료병이 부러진 팔을 나무판에 묶는 동안 짐승은 낮게 울며 코로 땅을 쓸었다.

아린드라는 빈자리를 보고도 다른 코끼리를 몰아넣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궁수들에게 성루에서 돌을 밀려는 병사들의 손과 어깨를 겨누게 했다. 화살이 돌무더기 위로 날아들자 적의 손이 멎었다.

공격의 박자가 한 번 끊겼다. 장군 하나가 지금 밀지 않으면 성벽의 궁수들이 돌아온다고 외쳤다. 아린드라는 서쪽에서 나는 나팔을 들었다. 낮은 벽 쪽의 보병이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는 두 번의 짧은 소리였다.

“한 번 더 기다립니다.”

그 사이 난다는 마탕가의 눈가를 손으로 쓸고 가죽 덮개의 끈을 다시 조였다. 서쪽 나팔이 길게 한 번 울린 뒤에야 그가 손을 들었다.

세 번째 충격에 문틀 한쪽이 꺾였다.

마탕가가 어깨를 밀었다. 거대한 문짝이 안으로 넘어졌고, 그 옆에 붙은 약한 벽이 돌과 흙을 쏟았다. 아침 햇빛 속에 성의 한 귀퉁이가 사라졌다. 병사들은 먼지 때문에 적도 아군도 볼 수 없었다.

“코끼리 뒤에 붙지 마라! 간격을 벌려!”

난다가 외쳤다. 아린드라는 그 명령을 반복했다. 함성이 아니라 명령이 먼지를 통과했다.

기병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왕자는 바흐람이 열린 서쪽 틈으로 달아날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틈에서 나온 것은 기병이 아니라, 목에 밧줄이 묶인 사람들이었다.

인질들이었다. 바흐람의 병사들이 그들 뒤에서 활을 들었다.

맨 앞에는 맨발의 노인이 있었고, 그 뒤로 곡식 창고에서 끌려온 사람들의 옷이 보였다. 밧줄은 한 사람의 목에서 다음 사람의 손목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넘어지면 앞뒤 사람이 함께 멈췄다. 성 안의 병사가 창자루로 그들의 등을 밀었다.

난다가 마탕가를 멈추게 했다. 짐승의 앞발이 땅에 닿으며 먼지가 다시 일었다. 말라바 궁수들은 이미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인질 사이로 적의 가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린드라가 손을 들었다. 말라바의 화살이 멎었다. 그 짧은 침묵을 타고 바흐람의 기병들이 다른 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라세나가 서문 쪽 먼지를 보았다.

“저 움직임을 막지 않으면 빠져나간다.”

아린드라도 보았다. 기병을 돌리면 바흐람의 길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인질 앞에 세운 방패병을 빼야 했다.

아이 하나가 밧줄에 쓸린 목을 만지며 울음을 참았다. 먼지 속에서도 그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아린드라는 든 손을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