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 · 성문과 판
여왕은 길을 열려고 보병 하나를 내주고, 왕자의 떠남을 허락한다.

현재의 곡창 요새에서 인질들이 걸어 나오기 열 해 전, 궁정 대전에서는 여왕과 아들의 대국이 해가 저문 뒤에도 이어졌다.
향 하나가 끝까지 타자 시종이 새 향을 가져왔다. 여왕은 보병 하나를 내주어 길을 열었다. 아린드라는 그 틈을 막는 대신 다른 쪽에서 말을 돌렸다. 이번에는 여왕의 손이 멈췄다.
여왕이 내준 보병은 판 가장자리에서 오래 움직이지 못하던 말이었다. 그것이 한 칸 나가 잡히자 뒤에 갇혀 있던 전차의 길이 열렸다. 낮의 여왕이었다면 옆의 말을 붙여 지켰을 자리였다. 아린드라는 잡은 보병을 판 옆에 놓으며 어머니를 보았다.
“전차를 내주기 전부터 보았느냐.”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았느냐?”
“어머니께서는 흩어진 말을 견디기 어려워하십니다.”
여왕은 눈을 들었다. 아린드라는 판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이 판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견딜 수 있고?”
아린드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궁정을 떠나 배우겠다는 말은 혼자 길을 정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자신이 떠난 자리에 남을 사람들의 마음까지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견뎌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가고 싶습니다.”
여왕은 열린 길로 전차를 움직였다. 공격할 수 있는 말이 생겼지만, 그 전차를 지키려면 다른 쪽의 코끼리를 떼어 놓아야 했다. 그녀는 손을 뗀 뒤에야 갈라진 두 무리를 번갈아 보았다.
“떠나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르다.”
“압니다.”
“아니. 아직은 모른다.”
여왕의 목소리는 꾸짖을 때보다 조용했다. 아린드라는 아니라고 우기지 않았다. 그 차이를 배우려고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너무 잘 준비된 대답처럼 들릴 터였다.
마지막 수 뒤에도 여왕은 오래 앉아 있었다. 왕이 위험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잡거나 막거나 달아나는 방법을 하나씩 확인한 케샤바가 고개를 숙였다. 타라는 마지막 움직임을 적었다.
아린드라에게는 전차 하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말들이 남은 판의 길을 넓게 차지했다. 구경꾼들은 뒤늦게 웅성거렸다. 왕자가 크게 이겼다는 말이 문밖으로 나갔다.
여왕은 왕을 눕히지 않았다.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대로 하겠다.”
아린드라도 일어났다. 준비했던 말이 모두 사라졌다. 기쁠 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손이 탁자에서 떨어지는 순간 가슴이 먼저 아팠다.
그는 대국 전에 세 가지 말을 외워 두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배운 것을 나라를 위해 쓰겠다는 말, 자주 소식을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어느 것도 지금 어머니의 얼굴 앞에서는 맞지 않았다.
“어머니.”
“네가 이긴 것을 내가 슬퍼하면 안 되겠지.”
여왕은 사람들 앞에서 웃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복도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있었다. 아린드라는 그 손을 보지 못했다.
그날 타라는 기보의 마지막 줄을 비워 두었다. 여왕이 대전을 나간 뒤에도 아린드라는 한동안 판 앞에 앉아 있었다.
케샤바는 말을 상자에 넣으러 왔다가 왕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맞은편에 앉았다.
“전차를 다시 깎아 드릴까요?”
“잡힌 말인데요.”
“판이 끝났으니 다음에는 돌아와야지요.”
아린드라는 판 옆에 누운 전차를 집었다. 마구간에서 다라세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판의 말은 다음 판에 돌아오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케샤바는 전차를 받아 다른 말들과 함께 상자에 넣었다. 타라는 빈 마지막 줄 위에 날짜만 적었다. 승자의 말도 패자의 말도 대신 지어 쓰지 않았다. 아린드라는 먹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 뒤 기보를 직접 말아 들었다.
COMMENTS
댓글 0
이 글에 대한 의견이나 질문을 남겨 주세요.
댓글은 구글이나 카카오로 시작한 뒤에 남길 수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