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판이 떠난 뒤
인쇄소에서 여왕의 말이 길게 달리기 시작한다.

살마가 서쪽으로 떠나는 의사에게 판 사본은 그의 제자에게 넘어갔고, 다시 이름 모를 번역자의 손에 들어갔다. 전투 부분만 골라 베끼는 사람도 있었고, 여왕의 편지만 옮겨 자기 아이에게 읽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 사본 하나가 지중해와 가까운 도시까지 이르렀다.
의사는 길에서 책을 치료 도구와 함께 보관했다. 마탕가의 발을 씻는 그림 옆에 사람의 상처에 쓰는 약 이름을 적었고, 해진 천이 떨어진 날에는 책을 감싼 천까지 풀어 썼다. 그가 죽은 뒤 제자는 약병과 장부를 나누어 받으며 사본도 가져갔다. 제자는 그림이 있는 장만 자주 펼쳤고 여왕의 편지는 접힌 채 남았다. 빚을 갚으려고 의원을 정리할 때, 책은 항구의 서기관에게 약값의 일부로 넘어갔다.
서기관은 배에 실을 물품 목록을 여러 언어로 옮기던 사람이었다. 그는 낡은 사본을 한꺼번에 번역하지 못해 읽을 수 있는 대목마다 별지를 끼웠다. 항구가 바뀔 때마다 그 별지를 알아보는 사람이 달랐다. 어느 필사자는 코끼리를 본 적이 없어 그림을 탑으로 옮겼고, 다른 사람은 여왕의 편지만 자기 말로 베꼈다. 마지막 소유자는 놀이책을 모으는 상인이었다. 그는 서로 크기가 다른 장들을 가죽끈으로 묶어 인쇄소 주인에게 팔았다.
15세기 말, 지중해와 가까운 도시의 인쇄소에서 이네스는 낡은 필사본 한 권을 조판하고 있었다. 주인은 놀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새 규칙의 해설서 뒤에 붙이면 잘 팔릴 거라고 했다.
이네스는 먼저 장 수를 매겼다. 두 번 적힌 전투는 먹선으로 표시하되 지우지 않았고, 서로 다른 말로 쓰인 편지는 번역자에게 따로 보냈다. 돌아온 번역문에는 같은 사람이 ‘여왕’과 ‘어머니’로 달리 적혀 있었다. 그녀는 앞뒤 문장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조해 같은 인물임을 확인했다. 활자를 고를 때는 번역자가 확실하지 않다고 표시한 이름을 함부로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금속 활자는 새벽에도 차가웠다. 이네스는 조판대의 칸에서 글자를 하나씩 꺼내 거꾸로 놓고, 단어 사이에 얇은 쇳조각을 끼웠다. 한 줄이 헐거우면 들어 올리는 순간 활자가 쏟아졌다. 견습공은 원고를 소리 내 읽었고 이네스는 조판된 줄 끝에서 거꾸로 된 글자를 손톱으로 짚었다. 잉크에는 기름과 그을음 냄새가 났다.
이네스가 익숙하게 배운 체스에서는 여왕의 힘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들이 가져온 새로운 방식에서 여왕은 곧은 길과 비스듬한 길을 길게 달렸다. 비숍도 열린 대각선을 따라 멀리 움직였다. 몇 수 만에 오래된 방어가 무너졌다.
“너무 빠릅니다.”
견습공이 말했다.
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책이 팔리지.”
이네스는 인도 여왕의 이야기에서 신하 말을 설명한 대목을 읽었다. 지금 자기 판에 있는 여왕과는 달랐다. 새 규칙 해설 바로 뒤에 그 이야기를 붙이면 책방에서 펼쳐 보는 손님은 두 말을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 볼 터였다. 그녀는 여백에 ‘이 옛이야기의 말 걸음은 여기 설명한 새 규칙과 같지 않다’고 넣었다.
그 주석 하나를 넣으려면 아래의 두 줄을 다시 짜야 했다. 이네스는 조판 틀을 풀고 좁은 활자로 바꿨다. 견습공이 종이를 아끼려고 첫 교정쇄의 빈 가장자리에 수정 내용을 적었다. 주인은 판매 문구가 들어갈 자리가 줄어든다며 손가락으로 주석을 가렸다. 이네스는 가린 채 본문을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옛 신하가 갑자기 새 여왕처럼 움직였다.
주인은 그 문장이 눈에 거슬린다고 했다.
“그 문장을 넣으면 판매 문구가 다음 장으로 밀려. 오늘 찍을 부수부터 맞춰야 해.”
“빼면 해설서와 이야기가 같은 규칙인 것처럼 찍힙니다.”
이네스는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글씨를 조금 작게 줄였다.
그녀는 인쇄기를 한 번 눌러 교정쇄를 뽑았다. 종이를 들어 올리자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엄지에 묻었다. 몇 글자는 낮아 희미했고, 여왕의 이름 하나는 활자가 뒤집혀 있었다. 이네스는 잘못된 활자를 핀셋으로 빼고 높이가 맞는 것으로 갈았다. 주석은 작아졌지만 본문 바로 아래에 남았다. 주인은 두 번째 교정쇄를 읽은 뒤 더는 빼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동생 토마스는 장사를 배우러 다른 도시로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 이네스는 그를 돌보았다. 가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길의 도둑과 질병부터 이야기했다. 마침내 토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이네스는 시험 인쇄지를 들고 집에 왔다.
“읽어 봐.”
토마스는 여왕과 왕자의 대국을 읽었다.
그는 활자에 눌려 종이가 오목해진 자리를 손끝으로 따라갔다. 왕자가 떠나는 대목에서 이네스가 작은 글씨로 남긴 주석도 읽었다. 토마스는 옛 말이 지금과 다르게 움직였다는 사실보다, 여왕이 약속한 뒤 아들의 짐을 대신 고르지 않았다는 데 오래 머물렀다.
“누나는 나보고 이기라는 거야?”
“아니.”
이네스가 말했다.
“너를 보내는 데 내가 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여행에 쓸 돈을 탁자에 놓았다. 넉넉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동전을 세지 않고 언니를 안았다.
둘은 포옹을 풀고 나서야 돈을 세었다. 마차삯을 내면 첫 주 숙소비가 모자랐다. 토마스는 새 외투를 포기하고 작업복을 기워 입기로 했다. 이네스는 인쇄소 주인에게 선금을 청하는 대신, 자신이 맡은 책의 추가 부수를 제본하는 품삯을 미리 계산해 달라고 했다. 토마스는 일자리를 주겠다는 편지를 꺼내 주소를 보여 주었다. 누나는 그제야 도착하면 찾아갈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새 규칙으로 체스를 두었다. 이네스의 여왕이 판을 가로질러 동생의 왕을 몰았다. 토마스가 크게 웃었다.
“책 속의 여왕도 이렇게 움직였으면 왕자가 못 떠났겠네.”
이네스는 작은 나무 여왕을 들었다.
“그 여왕은 말보다 멀리 갔어. 자기 손을 거두었으니까.”
인쇄된 책은 같은 문장을 여러 권에 남겼다. 토마스가 떠난 날, 이네스는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 모습은 조판된 어느 페이지에도 남지 않았다.
책은 낱장으로 말린 뒤 순서대로 포개졌고, 접지공이 큰 종이를 접어 장을 만들었다. 이네스는 장 번호가 뒤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여왕 이야기 끝에 자기 주석이 찍혔는지 부수마다 펼쳐 보았다. 일부는 도시 안의 책방으로 갔고 일부는 천과 유리 제품을 싣는 상인의 궤짝에 들어갔다. 주인은 수출 장부에 ‘새 체스 규칙과 옛 동방 이야기’라고 적었다.
토마스는 떠나는 마차에 그 책 한 권을 넣었다. 자기가 갈 도시의 상점 주인에게 줄 선물이었다. 이네스는 표지 안쪽에 이름을 쓰려다 그만두고, 잘못 접힌 장만 펴 주었다. 이후 재판을 거치며 인쇄소의 이름과 조판자의 손길은 차례로 지워졌지만, 작게 줄인 주석과 여왕의 편지는 여러 항구를 건너는 판본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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