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판이 떠난 뒤

여러 전승을 대조한 지연은 확인된 기록과 창작을 구분하며 번역 원고를 마무리한다.

다음 수를 고르는 사람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다음 수를 고르는 사람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지연은 여왕의 이름을 확인하려다가 여러 이름을 만났다. 어떤 전승에는 가브와 탈한드라는 두 왕자가 있었고, 죽은 아들의 운명을 어머니에게 보여 주려고 판을 만들었다고 했다. 다른 책에는 보상을 받은 현자와 쌀알 이야기가 실렸다. 자신이 가진 책의 여왕과 왕자는 그 어느 이름과도 정확히 맞지 않았다.

그녀는 검색창에 책에 적힌 여왕 이름의 철자를 하나씩 넣었다. 결과마다 서로 다른 전승이 섞여 나오자 창을 닫고 책 자체부터 살폈다. 표지 안쪽의 가격표를 떼지 않은 채 순서대로 촬영하고, 수리 도장이 찍힌 부분을 확대해 철자를 공책에 옮겼다. 종이에는 서로 다른 물무늬가 있었고, 여왕 이야기만 다른 활자로 찍혀 있었다. 한 권이 처음부터 지금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연은 장 번호와 꿰맨 구멍의 위치를 표로 적고, 확실하지 않은 제작지는 빈칸으로 남겼다.

도서관 목록에서는 제목보다 인쇄지와 판형을 먼저 대조했다. 비슷한 선집 세 권을 신청해 열람대에 놓자 책마다 여왕 이야기의 위치가 달랐다. 한 권에는 이네스가 남긴 주석과 같은 문장이 있었고, 더 늦은 판본에는 그 문장이 빠져 있었다. 지연은 어느 쪽이 원본인지 곧바로 결론 내리지 않고 발행 연도와 소장 경로를 카드에 따로 적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연구자는 지연의 책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연구자는 손을 씻고 완전히 말린 뒤 책 받침의 각도를 낮췄다. 제본이 당기는 곳에서는 페이지를 끝까지 펴지 않았다. 지연이 준비한 사진에서 상호와 새뮤얼의 이름을 읽고 시립 주소록과 옛 제본업자 명부를 펼쳤다. 두 사람은 성이 같은 사람들을 먼저 추렸지만, 가게 주소까지 맞는 기록은 하나뿐이었다. 그 주소의 제본공과 책에 수리 도장을 남긴 새뮤얼이 같은 사람인지는 도장의 활자 모양을 더 비교해야 했다.

“오래된 이야기라는 말과 실제로 일어났다는 말은 다릅니다.”

“그럼 이 여왕은 없었던 건가요?”

“이 책만으로는 있었다고 할 수 없어요. 없었다는 증명도 이 책의 몫은 아니고요. 우선 어느 문장이 언제 남았는지부터 보죠.”

지연은 그 답이 처음에는 답답했다. 하지만 사본들을 나란히 놓자 다른 것들이 보였다. 어떤 판본에서는 왕자가 혼자 적군을 무찔렀다. 다른 판본에는 공병과 기수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명령했고, 다른 쪽에서는 소식을 보냈다.

그녀는 투명한 자를 줄 아래 대고 차이를 한 문장씩 옮겼다. 삭제된 말은 붉은색, 나중에 보태진 듯한 말은 푸른색으로 표시했다가 색만으로 판단이 섞이는 것이 싫어 기호를 바꿨다. 판본 A에는 ‘돌아오라’가 있었고 판본 B에는 ‘도시의 사정을 알린다’가 있었다. C는 편지 전체를 생략한 채 왕자가 스스로 침입을 알아챈 것처럼 이어졌다. 살마가 전술 발췌본에서 편지를 덜어 냈을 때 생긴 틈과 닮아 있었다.

공병과 기수의 이름은 오래된 한 판본에만 남아 있었지만 전투 순서와 맞았다. 지연은 그 이름 옆에는 판본의 장 번호를 적고, 기록에 없는 대화 옆에는 빈 동그라미를 쳤다. 뒤섞인 메모를 보다가 공병의 이름 하나에 그어 둔 밑줄을 지웠다. 다른 판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지연은 아버지가 정해 준 전공을 그만두고 번역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말을 꺼낼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먹고살 거냐고 물었다. 지연은 그 물음이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걱정이 하루의 모든 선택을 대신할 때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녀는 처음으로 계획을 종이에 써서 가져갔다. 일을 구할 곳, 모아 둔 돈, 실패하면 다시 준비할 방법을 적었다. 여왕의 이야기만 읽어 드리고 허락을 얻을 생각은 버렸다.

첫 장에는 이미 연락한 번역 회사와 시험 날짜를, 둘째 장에는 석 달치 집세와 보험료를 적었다. 야간 수업을 마칠 때까지 맡을 수 있는 시간도 계산했다. 마지막 장에는 여섯 달 안에 수입이 기준에 못 미치면 주말 일을 늘리고 자격 시험을 다시 준비한다고 썼다. 해수는 ‘실패하면’이라는 제목에 줄을 긋고 ‘수입이 모자라면’이라고 고쳤다. 지연은 그 수정이 반대인지 도움인지 묻지 않고 다음 장을 보여 주었다.

해수는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아빠가 반대해도 할 거냐?”

“네.”

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그 떨림을 듣고도 종이를 돌려주었다.

“그럼 돈이 떨어지기 전에 말해라.”

지연은 고개를 숙였다. 오래전 편지와 닮은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편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

그날 밤 지연은 식탁 위에 오래된 책 대신 자신이 옮긴 번역문을 놓았다. 원문에서 읽히지 않는 곳은 괄호로 메우지 않고 빈 표시를 두었다. 해수는 여왕의 이름에서 한 번 막혔고, 지연은 여러 번 옮겨지며 소리가 달라졌다고만 설명했다. 둘은 편지 끝까지 읽었다. 해수는 감상을 말하지 않고 종이를 반듯하게 밀어 돌려주었다.

“명령을 안 쓴 게 쉬웠겠냐.”

지연은 아니었을 거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번역 회사 시험을 보러 나갈 때 그는 지하철이 지연된다는 소식을 먼저 알려 주었다.

며칠 뒤 공원에서 그들은 장기를 두었다. 해수는 지연의 마를 잡았다. 지연은 한 수를 오래 생각하다 졸을 옮겼다. 아버지는 언제 일어나라는 말도, 왜 그렇게 두느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연은 책상 왼쪽에 판본 사진을 띄우고 오른쪽에 번역표를 열었다. ‘다샤푸라’ 옆에는 지명을 확인한 자료의 쪽수를 달았다. 타라와 난다는 어느 사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창작 인물 칸에 넣었다. 마탕가의 상처는 사본의 치료 그림에서 읽히는 범위까지만 옮기고, 어떤 약으로 나았는지는 빈칸으로 두었다.

공병의 이름이 남은 판본에는 성벽 아래에서 흙자루를 나른 순서가 적혀 있었다. 지연은 그 줄을 사진과 다시 대조했다. 번진 글자 하나를 ‘밤’으로 읽으면 교대 시각이 맞았고, ‘물’로 읽으면 수문 장면과 이어졌다. 연구자에게 사진을 보내자 답은 짧았다.

“둘 다 가능하니 어느 쪽도 확정하지 마세요.”

지연은 번역문에 하나를 골라 넣는 대신 각주에 두 독법을 나란히 적었다. 확실한 답이 없는 곳을 견디는 일도 번역의 일부였다.

그녀는 부록 표를 세 칸으로 나누었다. 첫 칸에는 여러 판본에서 함께 확인되는 지명과 편지, 둘째 칸에는 후대 사본에만 남은 이름과 주석, 셋째 칸에는 이야기를 잇기 위해 만든 인물과 대화를 적었다. ‘므리날리니의 실재’라고 써 두었던 표제는 지우고 ‘이 책이 므리날리니라 부르는 인물’이라고 고쳤다.

프린터에서 나온 교정지를 해수가 집어 들었다. 그는 붉은 표시보다 비어 있는 칸을 먼저 보았다.

“여긴 왜 안 채웠냐?”

“주소가 같은 데까지는 찾았는데, 그 사람이 맞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어요.”

“찾을 때까지 기다릴 거냐?”

지연은 제본소 명부의 복사본을 한 번 더 보았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아니요. 모른다고 적고 보낼 거예요.”

그녀는 번역 회사에 교정본과 판본 대조표를 첨부했다. 전송 단추를 누르기 전 파일 이름과 받는 사람을 다시 확인했다. 손끝이 차가워져 컵을 감싸 쥐었다가, 정오가 되기 전에 전송을 마쳤다.

창을 여니 공원에서 장기말 놓는 소리가 올라왔다. 어느 판의 누가 이겼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아이가 오래 망설인 끝에 말을 집었고, 맞은편의 사람은 재촉하지 않았다.

해수는 교정지를 책상에 돌려놓았다. 지연은 비어 있는 칸을 그대로 둔 채 다음 번역 시험 일정을 달력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