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판이 떠난 뒤

뉴욕의 선창에서 유럽의 체스와 이민자가 가져온 장기가 같은 도시에 놓인다.

바다 건너의 두 판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바다 건너의 두 판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이네스의 인쇄소에서 찍힌 책들은 항구와 선박을 거쳐 여러 도시로 흩어졌다. 그중 짧은 여왕 이야기를 실은 번역 선집 한 권이 19세기 뉴욕 선창에 상자째 내려졌다. 조판자 이네스의 이름은 책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 판본은 처음 찍힌 책을 그대로 실은 것이 아니었다. 항구의 책 장수가 낡은 부수를 풀어 새 표지를 씌웠고, 다른 도시의 편집자가 놀이 규칙과 여왕 이야기를 선집에 옮겨 실었다. 작은 주석은 본문 아래에 남았지만 누가 확인하고 넣었는지는 빠졌다. 선집은 도매상의 주문 목록에 올라 대서양을 건널 상자에 들었다. 소금기 밴 밧줄로 묶인 상자는 선창 창고에서 서점 주인에게 팔렸고, 모서리가 찢어진 한 권만 반품되어 제본소로 왔다.

제본공 새뮤얼은 파손된 책을 수리하다 그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낮에 책을 묶고 밤에는 체스를 두었다. 자신이 유럽에서 배운 규칙이 이 도시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언어가 서툴러도 말을 움직이면 한동안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책의 실을 잘랐다. 바닷물을 먹은 장은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굳어 있었고, 표지를 열자 곰팡이 냄새가 났다. 새뮤얼은 마른 솔로 가루를 털고 찢어진 곳 뒤에 얇은 종이를 댔다. 밀가루풀을 너무 많이 바르면 인쇄 글자가 비쳤으므로 붓을 그릇 가장자리에 두 번 훑었다. 눌러 말리는 동안 그는 분리된 장을 순서대로 읽었다.

그가 책을 고치며 남긴 쪽지에는 ‘인도의 옛 장기 이야기’라는 말만 있었다. 그러나 새뮤얼이 두던 것은 이미 유럽에서 건너온 체스였고, 한 줄짜리 메모만으로는 두 놀이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새로 달라진 것은 말의 걸음보다 누가 누구와 마주 앉을 수 있는가였다.

새뮤얼은 자기 딸 루스에게도 체스를 가르쳤다. 루스가 잘 두게 되자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회장보다 학교가 먼저라고 답했다. 딸이 책을 펴면 장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무엇을 해도 먼저 해야 할 다른 일이 생겼다.

루스는 새벽에 가게 바닥을 쓸고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실을 밀랍에 문질러 아버지에게 건넸고, 손님이 끊긴 시간에 기보를 베꼈다. 대회 참가비는 심부름값에서 조금씩 떼어 봉투에 모았다. 새뮤얼은 그 봉투를 발견하고도 모르는 척했지만, 신청 마감일이 가까워지자 저녁마다 가게 문을 더 늦게 닫았다. 딸 없이 주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루스는 어느 날 제본 중인 책을 가리켰다.

“이 아들은 이겨서 나갔네요.”

“이야기잖니.”

“제가 이기면 저도 이야기인가요?”

새뮤얼은 답하지 못했다. 다음 주 그는 딸과 함께 동네 모임에 갔다. 몇몇 사람은 딸이 구경만 하는 줄 알았다. 루스는 자기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접수대의 남자는 참가자 이름을 묻고 새뮤얼을 바라보았다. 루스가 자기 이름을 다시 말하고 봉투에서 동전을 꺼냈다. 첫 상대는 인사한 뒤에도 아버지가 대신 둘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새뮤얼은 벽 쪽으로 물러났다. 딸이 여왕 앞의 보를 움직일 때 끼어들고 싶은 마음에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

루스는 첫 판에서 이기고 둘째 판에서 졌다. 패배한 뒤 상대와 기보를 맞추다가 열두 번째 수에서 비숍의 길을 놓친 것을 찾았다. 새뮤얼은 위로부터 하려 했지만 루스는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다음 모임 날짜를 물었다. 새뮤얼은 학교와 가게 일을 먼저 말하지 않고 날짜부터 대답했다.

다음 날 새뮤얼은 선집의 새 실을 팽팽하게 당겨 매듭을 책등 안으로 밀어 넣었다. 루스가 풀칠한 면지를 눌렀고, 아버지는 수리 도장에 날짜를 맞추어 찍었다. 둘은 마른 책을 종이에 싸서 처음 맡긴 서점으로 가져갔다. 서점 주인은 수선비를 치른 뒤 책을 다시 진열대에 세웠다.

수리를 마친 책은 처음 맡긴 서점의 진열대로 돌아갔다가 항해사에게 팔렸다. 그의 가족이 이사하면서 상자째 헌책상에게 넘겼고, 대학 도서실의 기증본이 되었다가 중복 도서로 다시 나왔다. 소유자의 이름과 가격표가 앞표지 안쪽에 겹쳐 붙었다. 새뮤얼의 도장은 풀 자국 아래에서도 남았다. 마지막 서점 주인은 누가 찾지 않는 놀이 선집으로 분류해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한 세기가 지난 뒤 뉴욕의 그 중고서점에서 한국계 이민자 지연이 책등의 희미한 글자를 보았다. 번역 자료를 찾던 그는 책값보다 수리비가 더 들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선집을 샀다. 여러 언어가 섞인 목차와 본문 아래의 작은 주석이 눈에 걸렸다. 아버지가 공원에 갈 시간이 다 되어 그날은 책을 천 가방에 넣은 채 따라나섰다.

해수는 한국에서 가져온 장기알을 수건에 싸 두었다. 공원 탁자의 돌 표면이 고르지 않아 얇은 종이를 접어 판 밑에 받쳤다. 그는 아는 사람에게는 한국말로 장군을 불렀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손짓으로 말을 돌려 주었다. 지연은 어릴 때 아버지 옆에서 잡힌 말을 정리했지만, 이 도시에서는 두 사람이 자리를 채우지 못할 때 직접 앉기도 했다.

지연은 동네 도서관의 방과 후 체스 클럽에서 이민 가정 아이들의 신청서와 규칙 설명을 번역해 주었다. 몇 주 동안 아이들과 기보를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두는 장기도 직접 보면 차이를 묻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담당자와 부모들에게 공원 수업 시간을 알린 뒤 아이들을 데려왔다. 아이 하나가 포를 들고 물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쓰던 접이식 체스판과 플라스틱 말을 들고 왔다. 해수와 늘 장기를 두던 사람들은 탁자 한쪽을 비웠다. 장기알의 한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에게 지연이 차와 마를 하나씩 짚어 주었다. 말 이름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걸음이 설명되지 않아 해수가 빈 판에 차례로 길을 만들었다.

“이것도 룩처럼 가요?”

해수는 포가 움직이고 잡는 방식을 천천히 보였다. 이번에는 장기를 두던 사람들이 나이트의 걸음을 물었다. 규칙이 닮은 곳마다 웃음이 났고 다른 곳마다 손이 멈췄다.

포 앞에 받침이 없자 아이는 룩처럼 밀려고 했다. 해수가 손바닥으로 길을 막고 다른 말을 하나 놓아 주었다. 잡을 때는 또 다른 포를 넘을 수 없다는 설명에서 모두가 판 가까이 몸을 숙였다. 옆 체스판에서는 나이트가 다른 말을 뛰어넘었다. 해수는 마의 다리가 막히는 자리에 손가락을 놓고 두 차이를 확인했다.

“미국 장기는 이렇게 바뀐 거예요?”

아이가 두 판을 번갈아 보았다.

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장기고 저건 체스야. 여기서 둘 다 두는 거지.”

그날 그들은 새 규칙을 하나 만들었다. 한 판이 끝나면 자리를 바꾸어 다른 놀이를 배우기로 했다. 그 규칙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첫 자리를 바꿀 때 장기를 두던 노인은 체스판의 흰 말부터 골랐고, 아이는 장기판에서 초를 잡았다. 지연은 두 판을 오가며 질문을 옮겼지만 승부에 유리한 수까지 대신 말하지 않았다. 해수는 체스의 캐슬링에서 왕과 룩을 어느 손으로 옮겨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답하자 그는 가장 천천히 말한 아이에게 다시 보여 달라고 했다.

해수는 체스의 여왕을 처음 움직이며 놀랐다.

“멀리도 가는구나.”

지연은 가방 속 책을 생각했다. 선집의 목차에는 자신이 아직 읽지 못한 마지막 장이 오래전 인도 여왕의 편지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읽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온 지연은 식탁에 마른 수건을 깔고 책을 펼쳤다. 공원 먼지가 가방 바닥에 조금 떨어졌다. 마지막 장으로 바로 가려다가 새뮤얼의 도장과 여러 가격표부터 사진으로 남겼다. 접힌 귀퉁이는 억지로 펴지 않고 종이띠를 끼웠다. 여왕의 편지 앞에는 다른 활자와 손글씨가 겹쳐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읽어 주기 전에 어느 문장이 언제 붙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