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 판이 떠난 뒤
고려의 바닷가에서 강이 있는 판과 강을 지운 판이 만난다.

린허의 목공소를 떠난 책은 내륙 장터에서 두 차례 빌려 읽힌 뒤 종이 장수의 손에 닿았다. 종이 장수는 샤오란의 덧글까지 한 권으로 베껴 묶고 원본을 돌려주었다. 항구 상인은 그 한 권을 약재 목록에 쓸 빈 종이로 알고 샀다가 글이 있는 것을 보고 값을 깎았다. 고려로 가는 선주는 젖기 쉬운 차 상자보다 약재 상자 안이 낫다며 사본을 꾸러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고려 후기, 바닷가에 비가 내리던 날 상선의 짐을 내리던 윤서는 그 젖은 상자를 받았다. 안에는 약재와 종이, 둥근 놀이말이 섞여 있었다. 상인의 통역을 맡은 그는 종이 사이에 끼인 낯선 여왕의 이야기를 읽었다.
배가 포구에 닿았을 때 상자 한 귀퉁이는 이미 물을 먹어 검게 부풀어 있었다. 윤서는 약재 꾸러미부터 마른 멍석으로 옮겼다. 종이를 잡아당기자 눅눅한 섬유가 손가락에 일어났다. 그는 칼등으로 장마다 틈을 내고, 상자 주인에게 종이도 화물 장부에 적혀 있느냐고 물었다. 상인은 약재만 건지면 된다며 종이는 품삯 대신 가지라고 했다. 그 대답으로 사본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것은 샤오란의 덧글까지 한 차례 베껴진 사본이었다. 린허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딸의 이름은 베끼는 과정에서 ‘어린 필사자’로 바뀌어 있었다. 윤서는 그 구절 옆에 물음표를 찍었다.
윤서는 젖은 장을 한꺼번에 펼치지 않았다. 방바닥에 새끼줄을 낮게 매고 종이를 한 장씩 걸었다. 아교가 풀린 책등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고, 빗물이 떨어질 때마다 글자 끝이 아래로 번졌다. 읽을 수 있는 줄은 마르기 전에 별지에 옮겼다. ‘린허의 딸’이라는 말 뒤가 찢겨 있었으므로 그는 이름을 짐작해 넣지 않았다. 대신 찢어진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었다.
그가 묵는 집의 주인 해진은 군인으로 성을 지킨 적이 있었다. 왼쪽 다리를 다친 뒤에는 장터에서 나무 그릇을 팔았다. 저녁에 윤서가 외국말의 뜻을 설명하면 해진은 칼로 말판의 선을 새겼다.
해진은 비가 오면 장터에 나가지 못했다. 그날도 팔리지 않은 그릇을 벽에 쌓고, 뒤틀리지 않은 널빤지를 골라 무릎에 올렸다. 칼끝이 옹이에 걸릴 때마다 왼쪽 다리가 함께 떨렸다. 윤서는 번역문에서 알아듣는 글자를 먼저 읽고, 모르는 놀이말은 둥근 말의 위치로 짚어 보였다. 둘은 같은 이야기를 옮기고 있었지만 하나는 문장을, 하나는 선을 따라갔다.
“그 나라 판에는 강이 있다지?”
“예.”
“우리가 두는 것에는 굳이 그리지 않아도 되겠군.”
윤서는 포구에서 판을 두던 뱃사람 셋을 불러 해진의 선을 보여 주었다. 한 사람은 강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강을 그려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궁 안의 빗금과 포가 말을 넘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윤서는 장부에 사람의 이름과 출신 고장을 적고, 각자가 실제로 말을 움직여 보인 순서를 따로 그렸다. 해진은 그 가운데 자신이 성에서 배운 방식으로 선을 새겼다.
사흘 뒤 내륙에서 소금을 사러 온 행상이 숙소에 들었다. 해진은 판을 내놓고 마와 상의 행마법부터 물었다. 행상의 방식은 궁 안에서 움직이는 선 하나가 달랐고, 포가 넘을 수 없는 말도 해진이 알던 것과 달랐다. 윤서는 어느 쪽을 맞다고 고르지 않고 두 방식 옆에 사람과 고장의 이름을 적었다. 행상은 인도 그림을 한참 보더니 자기가 두는 판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말이 둥근 것은 익숙하다고 했다.
완성된 말에는 차와 포와 마와 상의 글자가 들어갔다. 장수와 사는 궁 안에 놓였다. 해진의 딸 소월이 작은 말을 세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해진은 배나무 토막을 얇게 켜서 같은 크기의 원을 그렸다. 소월은 모서리를 사포 대신 거친 천에 문질렀다. 가루가 콧속으로 들어가 재채기가 났다. 윤서가 글자를 종이에 써 주면 해진이 먹을 묻혀 나무에 옮기고 칼로 팠다. 포 한 알의 획이 깨지자 소월은 버리려는 말을 챙겼다. 깨진 자리를 먹으로 메우면 쓸 수 있다고 했다.
“왕은 왜 이렇게 조금만 다녀요?”
해진은 다친 다리를 뻗었다.
“다들 왕을 지켜서 그런가 보지.”
“그러면 다른 말은 누가 지켜요?”
윤서는 인도의 왕자가 전차를 내준 대목을 읽어 주었다. 소월은 잃은 말부터 손바닥에 모았다.
“이건 이제 아무 일도 못 해요?”
“다음에 다시 놓으면 되지.”
해진이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성벽에서 떨어진 친구도 다음 판에 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바깥에서 군량을 거두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집집마다 곡식 자루를 내놓았고, 어느 집에서는 울음이 났다. 소월은 장기판 위에 작은 쌀알을 하나 놓았다.
문을 두드린 아전은 해진의 다리를 보고도 정해진 몫을 줄이지 않았다. 해진은 나무 그릇을 팔아 사 둔 좁쌀 자루를 열었다. 소월이 됫박을 잡고 윤서가 자루 입을 벌렸다. 곡식이 쏟아지는 소리는 비보다 가늘고 오래 이어졌다. 마지막 됫박을 비운 뒤 자루 바닥에 몇 줌이 남았다. 해진은 그것까지 털려다가 소월의 저녁 몫을 보고 손을 멈췄다. 아전도 재촉하지 않고 장부에 받은 양을 그대로 적었다.
“이것도 말이에요. 안 먹으면 못 움직이니까.”
해진은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윤서는 쌀알을 치우지 않았다.
다음 날 윤서가 책을 베끼자 소월이 옆에서 글자를 물었다. 그는 여왕의 이름을 소리대로 적었다. 여러 나라의 입을 거치며 이름은 많이 닳아 있었다. 원래 모습과 같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윤서는 먼저 마른 장과 젖어 번진 장을 나누었다. 원문 한 줄을 소리 내 읽고 자기 말로 옮긴 뒤, 뜻이 이어지지 않는 곳에는 작은 네모를 남겼다. 소월은 먹을 갈고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여왕의 이름은 앞장과 뒷장에서 소리가 달랐다. 윤서는 하나로 고치지 않고 두 이름을 나란히 적은 다음 ‘같은 사람으로 보임’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여왕이 약속을 지켰다는 문장은 남아 있었다.
소월은 그 문장을 열 번 썼다. 마지막에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윤서는 지우지 않았다. 샤오란의 이름이 닳아 없어진 자리 뒤에서 또 한 명의 어린 필사자가 자기 이름을 남겼다.
해진은 저녁마다 판을 폈다. 소월은 오래 두다가 가끔 아무 말도 움직이지 않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재촉하던 손을 무릎에 놓았다. 바깥의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비가 그친 뒤 윤서는 상인의 다음 통역 일을 따라 포구를 떠났다. 젖은 원본은 글씨가 더 떨어질까 두려워 해진에게 맡기고, 자신이 옮긴 사본만 가져갔다. 해진은 원본을 말판 상자 밑칸에 넣었고, 소월은 빌려 갈 사람의 이름을 적을 종이를 덧댔다. 중국에서 건너온 사본은 그 집에 남고, 고려에서 다시 옮긴 문장들은 윤서의 보퉁이 속에서 다른 고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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