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살아갈 길과 돌봄
나는 한때 아이를 시설에 두고 떠난 부모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한 사건을 접한 뒤였다.
버림받았더라도 살아 있다면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거친 비교였지만 그 안에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아이가 살아갈 시간이다.
이 생각을 책에 쓰려면 나 자신에게도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 떠났다는 말 안에는 서로 다른 행동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험한 곳에 놓고 사라지는 일, 정식 절차를 통해 돌봄을 요청하는 일, 치료나 생계 때문에 일정 기간 양육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은 같은 사건이 아니다.
그 차이를 지우고 모두 아이를 버렸다고 부르면 도움을 청한 사람까지 죄책감에 묶는다.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기 위해 자기 한계를 인정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 폭력이나 강요 때문에 헤어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밖에서 알지 못하는 사정을 도덕의 한 문장으로 정리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떠나는 일이 아이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모르는 기다림, 자신이 잘못해서 버려졌다는 생각, 설명 없는 이별은 가볍지 않다. 살아남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아이가 이후에 감당하는 고통을 또다시 작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통을 줄일 시간이 아직 있다는 뜻이다.
가상의 정은은 아이를 며칠 맡길 수 있는지 알아본다. 밤마다 일을 해야 하는데 돌봄을 부탁할 사람이 없다. 누군가는 엄마가 아이와 떨어져도 괜찮으냐고 묻는다. 정은은 그 말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아이를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 아이가 안전할 곳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다. 부모가 아이와 잠시 떨어지는 모든 상황을 관계의 실패로 보지 않아야 한다. 학교와 돌봄, 친족의 도움과 공적인 지원을 통해 양육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 있다. 위기 때 그 범위를 넓히는 것을 수치로 만들 이유는 없다. 다만 떨어져 지내는 일이 모든 위기의 첫 대답이 되어서는 안 되고, 가난 자체를 분리의 이유로 삼아서도 안 된다.
내가 처음 느꼈던 비교는 결국 이렇게 고쳐 쓸 수 있다.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나는 행동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부모의 절망과 함께 끝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의 미래가 실제로 살아 볼 만하도록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야 한다.
아이에게는 버려짐과 죽음만이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 부모와 함께 안전하게 살 길, 필요하다면 잠시 떨어져 보호받을 길, 이후에도 안정된 관계 안에서 자랄 길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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