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건에서 착안해 인물과 생애, 병실에서의 만남과 결말을 새롭게 구성한 단편소설입니다. 작품 속 인물과 대화, 가족관계 및 세부 상황은 허구입니다.
1. 저녁밥
열일곱 살의 소년은 돈을 세 번 세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방 뒷골목에서, 두 번째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마지막은 자기 방에서였습니다. 셀 때마다 액수가 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몇만 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사려고 했는지는 기억났지만 이제 그것을 사러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방문 밖에서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돈을 이불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밥상에는 평소와 같은 반찬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늦게 다니지 말라고 했고, 소년은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숟가락을 들었는데 손이 떨렸습니다.
“어디 아프냐?”
“아니.”
어머니가 이마에 손을 짚었습니다. 소년은 그 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다방 주인도 조금 전 그를 아이처럼 대했습니다. 늦은 시간 혼자 들어온 소년에게 커피 대신 다른 것을 마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계산대 쪽을 보았습니다. 돈을 빼앗겠다고 마음먹은 뒤에도 돌아설 기회는 있었습니다. 주인이 잠시 등을 돌렸을 때도, 자신의 손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 뒤의 일을 떠올리려 하면 소리가 먼저 들렸습니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주인의 숨소리, 자기 운동화가 문턱에 걸리는 소리였습니다.
소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체했나 보다.”
어머니는 찬장에서 소화제를 찾았습니다.
그날 밤, 소년은 경찰이 대문을 두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잠에서 깨면 창문 틈으로 골목을 살폈습니다. 자동차가 집 앞에서 멈추기만 해도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경찰은 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그는 훔친 돈으로 담배를 샀습니다. 가게 주인이 잔돈을 내밀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돈을 받는 손에도, 거스름돈을 주는 손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잔돈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쓸 수 없을 것 같았던 돈이 그렇게 조금씩 없어졌습니다.
2. 첫 사건
형사의 이름은 강태수였습니다.
형사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혼자서 사건 하나를 끝까지 책임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방 주인 살인사건은 그가 처음부터 매달린 사건이었습니다.
현장에는 범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문과 혈흔이 있었고, 뒷문 쪽에는 신발 자국도 있었습니다. 족적과 현장 상황을 바탕으로 범인은 키가 작은 사람일 수 있다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백육십 센티미터 안팎이라는 말이 수사회의에서 오갔습니다.
태수는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문을 남긴 사람이 아직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않은 열일곱 살 소년이라는 사실을, 당시 경찰은 몰랐습니다. 흔적은 있었지만 이름이 없었습니다.
태수는 인근 다방과 여관, 공사장을 돌았습니다. 비슷한 체격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리면 밤에도 찾아갔습니다.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화를 냈고, 어떤 사람은 울었습니다. 태수는 사과하고 다음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피해자의 딸이 경찰서에 온 것은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아이는 교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책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태수가 사준 음료는 끝내 뚜껑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엄마 돈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는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많지도 않았을 텐데.”
태수는 반드시 잡겠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도 했습니다. 아이는 그제야 그를 보았습니다.
그 눈을 본 뒤로 태수는 다른 사건을 맡고 있어도 마음 한쪽이 늘 그 다방에 남아 있었습니다.
3. 작업복
소년의 이름은 박정호였습니다.
스물이 넘자 정호의 어깨가 벌어졌습니다. 키도 자랐습니다. 거울 속 얼굴에서는 열일곱 살 때의 가느다란 턱과 겁먹은 눈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시멘트 공장에 취직한 뒤에는 하루가 빨리 갔습니다. 일을 배우고, 실수해서 욕을 먹고, 작업복에 밴 먼지를 털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쳐서 쓰러져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는 잔업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일도 맡았습니다. 반장은 성실한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나오다가 공장 앞에서 형사를 만났습니다.
태수가 다방 이름을 말하는 순간 정호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습니다. 이 사람을 피해 달아나야겠다는 생각과, 달아나면 끝이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습니다.
“그 무렵 이 근처에 살았다면서요.”
“예.”
“혹시 기억나는 사람 없습니까?”
정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당시 살던 곳과 학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섞어 대답했습니다. 태수가 오래전 자기 행적을 묻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형사는 수첩을 넘겼습니다. 표지 귀퉁이가 닳아 있었습니다. 손가락 옆에는 작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찾고 있구나.
정호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태수가 돌아선 뒤에도 그는 한동안 식당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동료가 부르자 뒤늦게 따라 들어가 식은 국에 밥을 말았습니다.
그 뒤로 정호는 태수의 얼굴을 잊지 않았습니다.
태수에게는 수많은 탐문 대상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정호에게는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형사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정호는 소개로 만난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식 날 신부의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우리 딸 잘 부탁하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잘 살겠다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잘하고 싶었습니다.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기르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 약속만큼은 지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난 날에는 병원 복도에서 울었습니다.
간호사가 아이를 안겨주자 그는 두 손을 어디에 받쳐야 할지 몰라 쩔쩔맸습니다. 아내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받쳐주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워?”
정호는 웃지 못했습니다.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열일곱 살의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에게는 이런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정호는 아이를 아내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감격해서 말을 잃은 줄 알았습니다.
4. 기다림
태수의 수첩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목격자와 용의자의 이름이 가득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름 옆에 다른 기록들이 붙었습니다.
이사. 연락 두절. 사망.
확인할 사람은 줄었지만 범인은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건을 해결한 날에도 축하를 받고 나면 어딘가 찜찜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중에 제보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는 식탁 위에 덮어둔 접시를 가리켰습니다.
“당신 밥은 데워 먹어.”
그는 변명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 뒤 피해자의 딸을 다시 찾아갔을 때,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하는 가게 앞에서 태수를 맞았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대신 근처 커피숍을 가리켰습니다.
태수는 새로 확인할 것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딸은 한참 듣다가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기다려도 돼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확인하려던 단서도 결국 사건과 관계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태수는 전화를 걸었다가 끊었습니다. 며칠 뒤 다시 걸어 사실을 알렸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딸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태수는 그 뒤로 그 집을 찾아갈 때마다 초인종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한편 정호의 집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성적 문제로 부자가 다투었습니다. 아이가 방문을 닫자 정호는 문 앞에 서서 잔소리를 했습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몰라.”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호는 방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습니다. 저녁에 아이가 나오자 평소보다 많은 용돈을 주었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해주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했습니다.
정호는 아이가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했습니다. 친구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필요 없는 물건을 살지도 몰랐습니다. 그 정도 일로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화해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
태수가 교통과로 옮기겠다고 했을 때 상사는 며칠 더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이미 충분히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사건 사진이 든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기록은 인계하면서도 그 봉투는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한참 뒤에야 서류철 안에 도로 끼워 넣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물었습니다.
“이제 좀 편해지는 거야?”
그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교차로에서 길을 건너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신호가 바뀌자 학생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태수는 호루라기를 불고 천천히 건너라고 손짓했습니다.
다 건넌 줄 알았는데 한 아이가 뒤늦게 달려왔습니다. 그는 차를 세우고 아이를 건네주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자 이상하게 목이 메었습니다. 누군가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낸 일이 그날따라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다방의 기억이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명절이면 옛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한참 나눈 끝에야 그 사건 소식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없다는 대답을 들으면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듯 짧게 응답했습니다.
5. 옆자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늙었습니다.
정호는 공장 계단 중간에서 멈추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나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이번 작업만 끝내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태수도 기침을 오래 했습니다. 도로 위에서 보낸 세월이 길었습니다. 퇴직 뒤에도 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업무와 병의 관련성을 인정받기까지 서류를 모으고 진료기록을 제출하는 동안 아내는 남편보다 더 지쳤습니다.
검사를 받고, 약을 먹고, 다시 검사를 받았습니다.
정호는 자식들에게 병을 작게 말했습니다. 태수는 아내에게 검사 결과를 보여주면서도 의사가 했던 말 몇 가지를 빼놓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이 걱정하는 얼굴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정호가 먼저 와 있었고, 며칠 뒤 옆 침대에 태수가 들어왔습니다.
정호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먼저 들었습니다. 늙고 갈라진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알았습니다. 오래전 공장 앞에서 수첩을 넘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태수는 보호자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침대에 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그러다 옆자리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호는 대답이 늦었습니다.
태수는 그가 숨이 차서 그러는 줄 알고 더 말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 정호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 하셨어요?”
“경찰이었습니다.”
“그러셨구나.”
정호는 이불 끝을 펴서 무릎 위에 덮었습니다.
“나는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날 저녁, 태수는 물병 뚜껑을 열지 못해 애를 먹는 정호를 도와주었습니다. 정호는 고맙다고 했습니다. 태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물병을 돌려주었습니다.
“자식은 몇이나 두셨어요?”
두 사람은 자식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쪽도 자식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을 서운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는 말을 번갈아 했습니다.
소등 시간이 되자 태수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정호는 늦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도요.”
그날 밤에는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옆 침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
우정은 특별한 일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수가 검사실에 다녀오면 정호가 텔레비전에서 놓친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정호가 밥을 남기면 태수가 반찬이라도 먹으라고 했습니다. 둘 다 복도를 몇 번 왕복하지 못했지만 엘리베이터 앞 의자까지 가서 한참씩 쉬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멀리 왔네요.”
정호가 말하면 태수는 의자를 가리켰습니다.
“저 의자가 가까이 온 거요.”
둘이 웃다가 함께 기침을 했습니다.
정호의 아내가 집에서 가져온 반찬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태수의 아내는 과일을 두 사람 몫으로 깎았습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가리키며 어린애 둘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정호는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먹었습니다.
어느 저녁, 병실에 둘만 남았을 때 태수가 다방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첫 사건이었어요.”
정호는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습니다.
“잡았습니까?”
“못 잡았지.”
태수는 손등의 주삿바늘 자국을 문질렀습니다.
“그 집 딸이 있었어요. 처음 봤을 때는 학생이었는데 나중에는 애 엄마가 됐더라고. 나는 그때도 기다려 달라는 말밖에 못 했고.”
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습니다.
“지금도 찾습니까?”
“찾아야지.”
태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습니다.
“내가 못 해도 다른 사람이.”
정호는 그날 밤 아내에게 병실을 옮기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태수의 호흡이 갑자기 나빠졌습니다. 정호는 자기 호출 버튼을 눌렀습니다. 간호사가 달려왔고, 의료진이 태수의 침대를 둘러쌌습니다.
그가 검사실로 옮겨진 뒤 정호는 빈 침대를 보았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이 정호를 오래 괴롭혔습니다.
6. 설탕통
정호가 먼저 나빠졌습니다.
오후가 되면 말을 줄였고, 저녁밥은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큰아들이 병실에서 아버지의 발을 주물렀습니다.
“우리 때문에 고생만 했네.”
정호는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이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태수는 잠든 줄 알고 텔레비전을 껐습니다.
“안 자요.”
정호가 말했습니다.
“그냥 좀 생각했어요.”
밤이 깊자 정호는 자기 몸을 조금 돌렸습니다. 태수 쪽을 향하려다 숨이 차서 멈췄습니다.
“옛날에 공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태수가 그를 보았습니다.
“어떤 어린놈이 돈을 훔치러 다방에 들어갔답니다.”
정호는 천장을 보며 말했습니다.
“주인이 알아보면 어쩌나 싶어서 겁이 났겠지요. 돈만 가져가면 될 걸, 그 사람이 붙잡으니까…….”
그는 기침을 했습니다. 태수는 잠자코 기다렸습니다.
“몇만 원이었답니다. 그걸 가져가서 세어봤다고 합디다. 세 번이나.”
태수의 손이 이불 위에서 멈췄습니다.
“그놈 셔츠에서 흰 단추가 떨어졌는데, 주인이 마지막까지 그걸 쥐고 있었답니다.”
정호는 손가락을 오므렸습니다.
“그걸 펴서 가져갔어야 했는데. 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답니다. 떨어진 단추가 자기 것인 줄 알아볼까 봐.”
태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요.”
“손에서 빼기는 했는데 주머니에 넣기가 싫었나 봅니다. 설탕통에 넣었대요. 뚜껑을 열고, 설탕 속으로 밀어 넣고.”
그때였습니다.
태수는 계산대 위의 금속 설탕통을 보았습니다. 수십 년 전 현장에서 보았던 그대로였습니다. 감식 중에 발견된 흰 단추. 설탕을 털어내고 작은 봉투에 넣었던 단추.
그 위치는 언론에 공개한 적이 없었습니다.
피해자의 딸에게조차 설명하지 않았던 사실이었습니다.
태수는 옆 침대의 남자를 보았습니다. 늘 밥을 남기던 사람, 자식이 바쁘다며 웃던 사람, 새벽에 자기를 위해 간호사를 불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얼굴 뒤로 공장 앞의 청년이 희미하게 겹쳤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그는 늙은 얼굴들이 비슷해지는 탓으로 여겼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정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공장에서 누구에게 들었어요.”
정호가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그 형사가…….”
그는 숨을 들이마시느라 말을 끊었습니다.
“한 번 왔었답니다. 공장 앞으로. 수첩을 들고.”
태수는 침대 난간을 붙잡았습니다.
“그때는 이름을 몰랐는데.”
정호가 태수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보았습니다. 복도에서는 바퀴 달린 카트가 지나갔습니다. 정호의 산소 줄이 볼 옆에서 조금 흔들렸습니다.
“그 따님은…… 잘 삽니까?”
태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습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정호의 눈가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태수는 휴지 상자를 보았습니다. 며칠 전 같았으면 한 장 뽑아 건네주었을 것입니다.
그날은 손을 뻗지 못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태수가 말했습니다.
정호는 눈을 감았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태수는 더 물어야 했습니다. 그날 들어간 시각, 가져간 물건, 주인을 해친 뒤에 한 일들을 하나씩 확인해야 했습니다. 가족에게 말했는지, 왜 지금 말하는지도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호의 호흡이 흐트러졌습니다.
태수는 호출 버튼을 눌렀습니다.
간호사가 들어왔고 잠시 뒤 의료진이 달려왔습니다. 태수는 밀려나듯 자기 침대 머리 쪽으로 물러났습니다. 정호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날 새벽 정호가 죽었습니다.
마지막 말을 끝내 듣지 못한 태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7. 이름
태수는 날이 밝기 전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방 사건 기록을 봐줘. 설탕통 속 단추부터.”
잠에서 깬 후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태수는 옆 침대를 보았습니다. 정호의 아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아버지를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
태수는 병원 이름과 정호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어서 밤에 들었던 말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했습니다. 확실히 들은 것과 기억이 흐린 것을 나누어 말하고, 정호가 입원해 있던 자리도 알려주었습니다.
“장례 절차가 진행되기 전에 확인해줘. 필요한 절차를 밟아서 대조할 자료를 확보해야 해.”
전화 너머에서 후배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선배님, 아는 분입니까?”
태수는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옆자리 환자야.”
그는 잠시 뒤 덧붙였습니다.
“내 친구였어.”
***
경찰이 병원으로 왔습니다.
정호의 아들은 처음에 아버지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당한 줄 알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태수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태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평생 공장 다니면서 우리 키웠어요. 누구하고 싸우는 것도 못 봤습니다.”
태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내용은 진술하겠다고, 확인은 증거로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서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감정이 진행되는 동안 태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정호가 누군가에게 정말 들은 이야기일 가능성도 되짚었습니다. 그러다가 공장 앞에 왔던 형사를 이야기하던 목소리와 마지막 눈길을 떠올렸습니다.
정호의 물병은 가족이 가져갔습니다. 병상 이름표도 없어졌습니다. 청소를 마친 침대에는 새 시트가 씌워졌습니다.
며칠 뒤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현장 지문과 정호의 지문이 일치했습니다. 보존된 현장 증거물에서 얻은 DNA도 같은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정호가 말한 흰 단추의 발견 위치는 기록과 맞았습니다.
후배는 설명을 마친 뒤 태수를 보았습니다.
“찾았습니다.”
태수는 결과지를 받아들었습니다.
오래전 기록에는 이름 대신 지문 사진과 번호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옆에 박정호라는 이름이 놓였습니다.
범행 당시 열일곱 살.
태수는 그 나이를 오래 보았습니다. 자신이 찾아다니던 작은 체격의 어른들, 문전에서 화를 내던 사람들, 억울하다며 울던 사람들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소년은 자라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태수도 늙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야 두 사람의 시간이 같은 기록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8. 남은 사람
피해자의 딸이 병원에 온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태수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딸은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들어왔습니다. 머리에 흰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손에는 젖은 우산이 들려 있었습니다.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태수가 말했습니다.
딸은 우산을 접어 벽에 세웠습니다.
“직접 듣고 싶어서 왔어요.”
태수는 정호가 한 말과 확인된 증거를 설명했습니다. 다만 병실에서 그가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였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딸이 물은 것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사람, 죽을 때 가족이 있었어요?”
태수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가족들이 왔습니다.”
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엄마는 혼자 있었는데.”
태수는 결과지를 내려놓았습니다.
딸은 울지 않았습니다. 손가방에서 작은 지갑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방 개업 날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주인은 화분 옆에 서 있었고, 교복 입은 딸은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태수가 사건 사진 속 모습으로만 기억하던 사람이 웃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이 가게 하면 대학도 보내줄 수 있다고 했어요.”
딸은 사진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습니다.
“나중에는 새아버지를 만나라고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일하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런데 그 말은 못 했네요. 그때는 엄마가 누구하고 결혼하는 게 싫었거든요.”
창밖으로 빗물이 흘렀습니다.
“저도 애 키우면서 별생각을 다 했어요. 내가 말을 잘 안 들어서 엄마가 늦게까지 일했나. 그날 빨리 오라고 전화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따님 잘못은 없습니다.”
태수가 말했습니다.
딸은 그를 보았습니다.
“알아요. 이제는 아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그녀는 사진을 다시 지갑에 넣었습니다.
“그 사람 가족은 알았대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딸은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이 불쌍하다고도, 용서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태수는 그 침묵을 기다렸습니다. 옛날처럼 반드시 잡겠다는 말을 할 필요도, 이제 편히 지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면회 시간이 끝날 무렵 딸이 일어섰습니다.
“엄마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태수도 일어나려 했지만 숨이 차서 의자 팔걸이를 잡았습니다. 딸은 괜찮다며 그를 앉혔습니다.
“계속 기억해주신 건 고맙습니다.”
태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딸이 나간 뒤에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끝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음에 전화가 왔을 때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였습니다.
***
저녁에 새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보호자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환자는 침대에 앉아 숨을 골랐습니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눈을 돌렸습니다. 침상 아래에서 물병 뚜껑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태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새 환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뚜껑을 건네주고 자기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휴대전화에는 아내의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겠다는 말과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태수는 한참 생각하다가 미역국이라고 적었습니다.
전송을 누른 뒤 서랍을 열었습니다. 후배가 가져온 감정 결과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태수는 종이 끝을 반듯하게 맞추어 파일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후배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보내려다 멈추고 한 줄을 먼저 적었습니다.
‘유족한테 전달할 기록, 빠진 것 없는지 다시 확인해줘.’
옆 침대에서 잠든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태수는 서랍을 닫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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