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30일, 뉴욕의 한 기자회견장.

토머스 미즐리 주니어가 기자들 앞에서 액체를 손에 부었습니다. 이어 병을 코 아래에 대고 증기를 들이마셨습니다. 자신이 개발에 참여한 휘발유 첨가제, 사에틸납이었습니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죽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물질이 위험한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미즐리는 자신의 몸으로 답했습니다. 잠시 이렇게 접촉하는 것은 해롭지 않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기자들 앞에 선 그에게는 이미 다른 경험이 있었습니다.

전해에 그는 납중독으로 일을 멈추고 플로리다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자기 몸에서는 위험의 증거를 발견했던 사람이, 대중 앞에서는 안전성의 증거가 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믿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발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의 판단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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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즐리는 188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11년 코넬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그는, 훗날 화학 분야에서 이름을 얻습니다. 출발점은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였습니다.

그가 맡은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엔진에서 나는 이상 연소 현상, 노킹을 줄이는 일이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엔진의 성능을 높이려 할수록 노킹이 걸림돌이 됐습니다. 찰스 케터링 아래에서 일하던 미즐리와 동료들은 여러 물질을 시험했습니다.

1921년 12월, 그들은 사에틸납을 첨가했을 때 노킹이 크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산업계가 기다리던 성과였습니다. 더 높은 성능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자동차 회사가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에, 연구원들이 답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물질은 인간의 몸에 다른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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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초, 미즐리는 납중독으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그해 2월에는 회복을 위해 플로리다에서 약 한 달을 보냈습니다.

이때 그는 납의 위험성을 처음 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에틸납의 독성을 경고하는 연락도 이미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즐리는 농축된 물질을 제조하고 취급할 때의 위험과, 소량을 섞은 휘발유를 사용할 때의 위험을 구별했습니다. 전자가 위험하다고 해서 후자까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논리였습니다. 그가 이후 발표한 글에서도 이런 입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대중의 안전을 충분히 입증했느냐는 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잠깐 증기를 들이마신 뒤 멀쩡히 서 있다는 사실로, 수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배기가스를 마셔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둘 사이에는 기자회견 한 번으로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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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뉴저지의 사에틸납 생산 공장에서 심각한 중독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노동자들이 신경계 증상을 보였고,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그해 10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즐리는 손에 액체를 붓고 증기를 들이마셨습니다. 위험을 의심하는 사람들 앞에서, 개발자가 직접 안전성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그 장면은 강렬했습니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든 사람이 맨손으로 만지고 숨까지 들이마신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해에 플로리다로 떠났던 연구원의 병력도, 공장에서 쓰러진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노출도, 앞으로 도로 위에서 반복될 배출도 그 짧은 장면 안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1925년에는 미국 공중보건국 주관으로 유연휘발유의 위험성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산업의 성과는 이제 공중보건의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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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즐리의 다음 성과는 차가운 곳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냉장고 등에 쓰이던 냉매에는 독성이 강하거나 불이 붙기 쉬운 물질이 있었습니다. 냉장고를 편리하게 쓰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위험이었습니다.

1928년, 미즐리는 앨버트 헨과 로버트 맥너리 등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냉매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프레온-12로 알려진 염화불화탄소, CFC 계열 물질이었습니다.

이 물질은 기존 냉매에 비해 독성이 낮고 불이 잘 붙지 않았습니다. 냉장고와 에어컨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눈앞의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음식을 차갑게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더운 실내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얻었고, 미즐리는 뛰어난 연구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냉매 연구로 1937년 퍼킨 메달을 받았고, 1941년에는 미국화학회의 최고 영예인 프리스틀리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냉장고 안에서 오래 버티던 물질은, 밖으로 새어 나온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안정성의 대가는 훨씬 높은 곳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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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미즐리는 소아마비를 앓아 거동이 어려워졌습니다. 발명가였던 그는 자신의 움직임을 돕는 장치도 고안했습니다.

1944년 11월 2일, 그는 오하이오주의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쉰다섯 살이었습니다. 그해 그는 미국화학회 회장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프레온 냉매는 여전히 중요한 산업적 성과였습니다.

그 냉매가 지구를 감싼 오존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는 끝내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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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마리오 몰리나와 셔우드 롤런드는 CFC가 성층권에서 분해되며 염소를 내놓고, 그 염소가 오존을 파괴할 수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미즐리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누출돼도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대기 중에서 오래 살아남아 성층권까지 올라갈 수 있는 성질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곁에서 안전성을 높여준 특성이 먼 하늘에서는 위험의 조건이 됐습니다.

그렇다고 유연휘발유와 프레온의 역사를 똑같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납의 독성은 미즐리 생전에도 경고됐습니다. 그는 직접 중독을 겪었습니다. 반면 CFC의 오존층 파괴 작용은 그가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밝혀졌습니다. 두 발명에는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책임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미즐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기자회견장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자신의 발명을 손에 붓고, 사람들 앞에 서 있던 연구원.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그날 쓰러지는지 여부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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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미국화학회: The Rise and Fall of Tetraethyllead. 2. — 사에틸납 개발, 납중독과 플로리다 요양. https://pubs.acs.org/doi/10.1021/om030621b

Environmental History: Ethyl lead gas history — 1924년 공장 중독 사고와 기자회견. https://environmentalhistory.org/ijoeh-lead/

미국 환경보호청: Lead Poisoning: A Historical Perspective https://www.epa.gov/archive/epa/aboutepa/lead-poisoning-historical-perspective.html

미 공중보건국: 1925년 사에틸납 관련 회의록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Proceedings_of_a_Conference_to_Determine.html?id=BPH1uIe9X3kC

ASHRAE: Air Conditioning and Refrigeration Timeline https://www.ashrae.org/about/mission-and-vision/ashrae-industry-history/air-conditioning-and-refrigeration-timeline

미국화학회: Chlorofluorocarbons and Ozone Depletion https://www.acs.org/education/whatischemistry/landmarks/cfcs-ozone.html

미국 환경보호청: Refrigerant Safety https://www.epa.gov/snap/refrigerant-safety

미국화학회: Thomas Midgley, Jr. (1944) https://pubs.acs.org/doi/10.1021/cen-v022n021.p1896